천룡사지를 다녀와서..(7)

天龍寺址는 초가을의 단풍을 두르고 거기에 서 있었다.
유달리 감나무가 많고, 대나무 숲이 많은 산길 끝에 天龍寺는 말없이 천년을 서 있었으리라. 삼층석탑은 무너져 몸뚱아리 갈라져 이 빈터에 나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근년에 이르러서야 삼층석탑의 아랫받침돌을 새로 장만하고, 그 위의 삼층 몸뚱아리를 밭에서 빼어 내고 길에서 옮겨 내어 다시 이곳에 쌓아 놓았다 한다.

지장보살을 모시던 별당은 불타 없어지고 주춧돌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그 곳에 가부좌를 틀고, 더 이상 목구멍으로 넘치는 눈물도 없이 더 이상 미어지는 가슴을 쓸어 내릴 것도 없이,
또 다시 처참한 이 곳 天龍寺址에, 가만히 앉아 삼층석탑을 본다. 돌은 깨어지고 헤어져 만신창이된 모습으로 삼층으로 올려져 그곳에 있었다.
김재륭은 날마다 저 탑을 돌며 극락왕생을 빌었으리라. 김재륭은 날마다 저 탑을 보며, 탑위로 지는 달에 눈물 훔치며 애끓는 마음을 달랬으리라. 큰아이가 내 옆에 앉아 '아빠 뭘봐' 가만히 귀에 대고 묻는 소리에 다시 돌아와 그 자리, 주춧돌 위에 내가 있다.

친구들은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채근하며 天龍寺址 돌담 넘어 호박이 뒹구는 밭길을 지나 용두암 앞에 선 민가로 갔다.

돌담을 건너 넘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노래부르며, 또는 일행을 부르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밀어닥친다. 민가에는 마당에 깐 멍석을 빽빽이 채운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술을 먹으며 난리를 치고 있었다.
아이들을 달래며 조금 떨어진 감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겨 가져간 김밥을 나눠 먹었다.

천년이 지난 이 자리에 우리는 또 무심히 김밥을 먹으며 초가을의 남산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무심한 세월은 아무도 탓하지 않고, 그저 초가을 감나무잎 붉은 마음으로 조용히 우리를 내려보고 있을 뿐이리라. 점심을 먹고, 드디어 고위산(高位山)을 오른다.
황룡이 마지막 일격을 받고 몸을 뒤틀어 산을 높이니 사람들은 이 산을 그저 '높아진 산'이라 하여 고위산이라고 불렀다.

남산의 북쪽 봉우리를 금오산(金鰲山)이라 이름 붙이고, 단종이 폐위된 후 매월당 김시습이 세상을 웃으며 금오산에 칩거하여 금오신화를 썼건만 이 곳 고위산은 그저 높아진 산일 뿐 남산의 최고봉으로서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권위를 가지지도 못했다.

고위산.
황룡의 마지막 뒤틀음이 바위가 되어 있고, 땅에서 채 삐져나오지 못한 채 죽어있는 황룡이 용두암이라고 하여 남아 있는 곳. 작은 아이를 업고 큰아이를 앞세우고 고위산을 오른다.
죽은 황룡의 등을 타넘고, 벌어진 비늘 사이로 天女가 대나무창을 내리꽂던 그 자리를 뛰어넘어 고위산을 오른다. 업힌 작은 아이는 등을 타고 내리는 땀이 되어 나를 짓누르지만, 그것은 옥죄는 고통을 달리 넘겨보려는 작은 마음일 뿐 산을 오를수록, 발아래 天龍寺의 너른 터가 눈에 완연히 들어올수록 처참한 역사의 피비린내는 가을바람이 되어 내 뺨에 잔칼질하듯 스며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산을 오른다.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이 서로를 지켜보는 초가을의 고위산을. 꿈과 환상 속에서 혼란스러운 내게, 멀리 가을바람이 일러 깨우치는 말, 사무쳐 가슴 졸이며 귀담아 듣는다.

" 그대들은 죽음의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구나 ! 하지만 그대들 삶의 한가운데서 죽음을 찾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 밤눈 밝은 올빼미는 낮엔 눈이 멀기에 결코 빛의 신비를 벗길 수 없을지니 그대들 진실로 삶의 참모습을 관조하고자 한다면 삶을 향하여 육신을 활짝 열라 강과 바다가 하나이듯 삶과 죽음도 하나 일터이니 그대들 희망과 욕망의 깊은 곳에 피안에 대한 무언의 깨달음이 잠자고 있구나. 그러니 꿈을 믿을진저. 꿈속에서야말로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이 숨겨져 있을지니."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중에서-

천룡사지를 다녀와서..(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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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룡사지를 다녀와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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